Q. 평범한 타인의 삶에 대한 관찰을 시작으로 이에 상상력의 살을 붙여 동화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러티브에 움직임, 소리 등이 더 해져 조형적으로 시각화되는 과정과 완성된 작업이

텍스트와 맺는 관계가 궁금하다.


어떤 이야기를 글을 다듬어보는 일은 작품의 결과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내가 창작의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하는 것이다. 음식을 만들때 오븐을 사용했다고 해서 음식에 오븐이 들어가진 않는다. 다만 오븐의 성능과 모양,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요리사에 따라 음식은 달라진다. 나는 문자라는 도구로 어떤 상황을 묘사해본다. 어떤 페인팅처럼 안료를 쌓아 올린다거나 우연의 효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말랑한 점토처럼 더하거나 빼기를 반복하면서 묘사한다. 문자로 시간의 흐름이나, 상황의 변이를 적어보며 그렇게 만들어진 글의 형식에서 나오는 리듬을 역으로 조각에 대입해보기도 한다.이때 나는 모국어인 한글을 사용한다. 모든 문자는 모양, 소리, 뜻으로 이루어진다. 한글은 표음 문자이고 동시에 자음과 모음으로 나눌 수 있는 음소 문자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살펴보면 글자 모양이 뜻과 연관되어 있다. 글자를 논외로 생각해보아도 우리는 소리에서 어떤 느낌을 받고, 모양에서도 어떤 느낌을 받는다. 한글은 모양으로 소리와 의미가 주는 느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탁월한 문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글을 다듬고 읽어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떤 유사한 모양과 소리가 떠오른다.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작품은 시각화 되면서 어떤 현장성을 갖는다. 나는 이부분이 불편하다. 제작하는 중에도 불필요한 의미가 떠오르게 되거나, 언젠가 타협의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글쓰기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도 생기지 않고, 타협의 순간도 없다. 현실에서 벋어 나서 창작을 하기위한 가장 편한 상태일 것이다. 충분히 만들어진 창작은 중력을 배려하고, 누군가 만든 오브제를 품고, 어디선가 만들어진 전기 에너지를 받아 유사하게 살아난다.


Q. 조각은 회화나 사진 등 다른 미술 매체보다 소재의 선택이 필연적으로 작업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수작업, 노동, 신체의 움직임을 반영한 듯한 아날로그적 요소들은 어떠한 의도로

작업에 개입되었나? 본인이 소재를 선정하는 기준이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양정욱에게 디지털 테크놀러지와 이것이 초래한 사회 전반적인 지각변동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1-아날로그적 요소가 왜 개입되었나?나의 작업방식은 이야기의 소재는 물론이고 재료 또한 매번 직관적 의지에 의해 진행되어왔다. 따라서 아날로그적 요소들은 의도라기보다는 필연이고, 필수가 되었다. 아날로그는 때로는 조사로서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고, 건축의 부재들을 조립하는 텍토닉처럼 사용되었다모든 입체물은 존재하는 순간 아날로그다. 땅 위에 서서 그림자를 만들고, 천장에 매달려 중력을 버틴다. 가벼운 것은 바람에 흔들리고, 무겁거나 커다란 것은 수고스러운 행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는다. 이 과정에서 재료와 행위는 순수한 시간을 담는다. 인간의 반복에서 오는 변형은 회화적이며, 빠르게 흐르게 할 수도,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불변의 시간을 담는다.아날로그적인 요소들은 가장 신선하게 작업을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유통과정을 최 소한으로 한 채소같은 것이다. 아날로그적인 농부는 기르고 수확하고 포장하고 배달한다. 구매자는 다듬고 요리하고 먹는다. 농부는 씨앗과 물, 끈과 트럭이 있다. 소비자에게는 각자의 주방과 요리법이 있다. 여기서 모든것은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연결되고 유연하다. 농부는 언제든 구매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구매자는 언제든 농부가 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반면 디지털적인 채소의 유통은 중간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포장하는 사람, 배달하는 사람, 물건을 파는 사람, 다듬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등 수 없이 나누어지고,방식을 정하고, 그들이 서로 알고 있게 해야 한다. 이제 디지털체계의 농부는 체계안에서의 소통 방식을 만들어야하고, 때로는 순응하며 수동적인 이들 모두에게 농부 자신의 방식을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 모든 설명을 끝내고 돌아온 농부는 이제서야 안심하고 자신의 일을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채소를 재배했다. 그는 다시 새로운 시스템을 설명을 해야 한다.여기서 농부는 점점 자신의 본래 할 시간이 줄어든다. 좋아하는 작물을 생각하고, 수확의 성취감을 떠올리고 그것으로 만들어질 요리들을 생각할 시간들이 줄어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농부가 좌절하는 순간, 우리는 어떤 아날로그를 발견한다. 아날로그는 점점 완벽해지고 싶어지는 우리의 세상에서 비틀거리며 우리에게 와서 냄새를 풍기며 쓰러진다. 촛불을 흉내낸 LED는 실망이 없고, 무한의 가상공간에는 무한의 실패와 무한의 성공이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꺼질지도 모르는 촛불 앞에서, 그리고 불쑥 잃을지도 모르는 삶속에서 언젠가 시들지도 모를 신선한 아날로그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아날로그는 어렵다.하지만 어려운 것은 언제나 귀하다.귀한 것에는 정성이 깃들어 있으며, 정성에는 온기가 있고그 온기에 사람들이 살고 아이들은 자란다.**우리가 귀한 것을 처음 시작할때에는 실패하면 어쩌지하는 불안보다는, 긍정의 마음이 필요하고우리가 귀한 것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는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며우리가 귀한 것을 보존하는 과정에는 완벽한 밀폐보다는 소중한 마음이 필요하다그리고 이런 마음들을 우리들은 볼 수 있다.2 재료 소재선정의 기준이 변하고 있나 ?요즘에 나는 굳어 가기 시작한 점토 같다. 나에게는 좋은 의미다. 초기에는 열심히 이리저리 늘려 모양을 만들어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늘어트린 모양을 단단하게 정돈해야 할 때가 오는 것 같다. 무리하게 어딘가를 늘리다 보면 찢어지고 만다. 새로운 소재는 언제나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지난 소재를 뒤로하고,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는 모습은 왠지 현명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야기였고, 소재는 가장 익숙한 몇개면 충분하다.2-3 디지털 테크놀러지 지각변동은 어떤 의미를 갖나?기술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사람이든 환경이든 물건이든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중에 기술은 태어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있는가?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러번 쓰다보면 글이 좋아진다. 글씨의 모양과 내용이 좋아진다.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 편지의 기술은 이렇게 태어난다. 기술이 있어야 편지를 쓰고,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간절히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작가로서 디지털 도구와 연관된 생태계에 대한 나의 인상은 글을 잘 쓰는 기술이 있으니까 편지를 써보려고하는 정도의 느낌이다. 디지털 기술은 물론 누군가의 사랑으로 발전된 것을 믿어 의심지 않지만, 이것은 어떤 사랑의 또다른 방법이 더 생긴 것에 불가하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반대개념이 아니며 변주이자 단축이며 어느 실용주의자의 사랑의 결과다.내가 느끼기에 이 디지털 기술은 어떤 허약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기술은 반드시 실재하는 것에 기반하고 기생한다. 독립적으로는 실존을 알 수 없다. 디지털은 태생적으로 아날로그의 모방이며 그것도 행위에 영역에 한정한다. 하지만 행위는 개개인의 구조주의적 인식의 한계에 부딪치며 조금 더 확장된 인식이 생기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이것 마저도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기술이다.또한 디지털기술은 특유의 빠름으로 기술의 실연자의 목적보다 기술자체에 의미에 함몰될 여지가 항상있다. 변화가 빠른만큼 실연자도 빨라져야 한다. 자동차가 점점 빨라지는 상상을 해본다. 시속 500키로 정도 되면 운전하기 버거워 질것이다. 그러면 운전을 일부 기술에 맡겨야 할 것이다. 단지 이동을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우리는 사실 빠른 차를 운전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Q. (관객으로서 작가님의 작업과 마주했을 때) 낯설지만 마치 쭈삣쭈삣 어색한 듯 꾸밈없이 민

낯을 드러낸 순수한 타인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하다. 에픽보다는 소시민들에 의한,

소시민들에 관한 동화(그러나 악당은 존재하지 않는…) 혹은 시와 유사하다 느낀다. 이러한

내러티브를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젠가 개인사에서 집단사로 내러티브를 확장할 잠재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가?

3-1내러티브에 대한 이야기우리들은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이것이 길면 긴 데로 짧으면 짧은 데로, 심지어 당시에는 어떤 의미가 없는 내용일지라도 이야기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듣거나, 지어내는 사람들에게 순간의 몰입은 즐거운 일이기 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듣는 사람은 없었으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쪽이었다. 개인적으로 길고 힘든 시간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은 유일한 즐거움이었으며, 간편한 위로가 되었다. 어느 순간 이 즐거움과 위로는 습관되어 지금의 직업이 되었다. 나는 이 습관을 통해 세상을 보며, 나라는 개인이 처한 조용한 고난속에서 아직은 버틸 만한 것, 그럴 만한 이유들을 상상한다.이런 상상은 대게 조용한 어른의 동화와 같은 편안한 것들이다. 이렇게 상상하며 위로 하다 글로 적고, 되뇌어 보기를 반복하다 보면 나는 평온해지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기분도 든다. 그러다가 더 나아가 그리고, 만들고, 순서 없이 반복되고, 뒤섞이다가 작품이 된다3-2개인사와 집단사우리는 모두 다른 삶을 산다. 하나의 시스템에서 비슷한 것 같지만 전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생각컨데 집단은 어느 순간의 상태일 뿐이며, 순간의 비슷함이다. 어떠한 집단사든 거기에는 무수히 다른 개인이 나름의 사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는 작가로서 집단의 경계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눈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사이에 있을 오롯이 혼자가 된 개인들을 떠올리고 상상하며, 끝없이 무리지음을 흐트러트리고 싶다. 의심없이 고정되는 문화와 구별하는 시선에는 분명 어떤 아늑함이 있다. 나도 그것이 싫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순간에만 긍정적 의미가 있다. 만약 이 아늑함이 영원하다면 아마도 그 우리는 아늑하다는 단어가 아니라 다른 단어로 불러야 할 것이다.집단은 순간이며, 그 속에는 무수히 다른 개인이 있다. 언젠가는 내가 상상한 개인들은 하나의 유사로 묶여 커다란 의미의 집단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Q. 현재까지 진행한 작업 중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품 혹은 기억에 남는 전시는

무엇이었는가?

직업을 다룬 3가지 종류의 시리즈 작업을 좋아한다.이것들은 직업이 겹치거나, 변하거나 ,오래되면서 생기는 개인들을 다룬 작업인데, 올해부터는 이 시리즈들만 할 예정이다.직업의 의미를 어느정도 지속되는 일상의 리듬같은 것이라고 포괄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같은 직업을 갖게된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면 신난다. 나는 한때 노동하는 학생이며, 장사하는 작가이며, 그림 그리는 조각가이기도 했다. 이런 시간속에서 나의 직업을 묻는 항공기의 입국수속 카드를 매만지며 직업시리즈를 구상하곤 했다.

Q. 본격적으로 미술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배경이 궁금하다. 언제 스스로를 미술가라

여기기 시작했는가?

대학에 진학을 2번째 실패했을 때, 나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때마다 나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성냥을 곧 잘 켰다. 새벽에 일을 하다가 성냥을 켜고, 어딘가 창고 구석에서 잠을 잘 때도 성냥을 켰다. 그러면 시간이 잘 갔다. 성냥을 많이 켜다보니 이 일은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었다. 나는 이 성냥의 작은 온기를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성냥의 모양을 고민하고, 불빛이 더 밣아보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아마도 그게 나의 미술의 시작이다.


Q 양정욱이 갖는 미술가로서의 판타지는 무엇인가?

작품 앞에서 한참동안 멈춰서 보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는 것과발표하지 않은 숨겨둔 유작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표정을 보는 나의 영혼


Q 작업을 지탱하게끔 하는 요소들이 무엇인가? 작업의 막다른 골목이라 느낄 때 돌아가기 위해

어떻게 하는가?

사랑하는 가족과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작업에서 막다른 골목은 대부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길은 만들면 그만이지만 언제나 방향과 방법이 중요하다. 어디로 길을 만들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길은 보이기 마련이다. 막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때가, 그리고 가만히 멈추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때가, 어쩌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보다 좋은 상황 일지도 모른다. 희망으로 가득 찬 상황이다. 실재로 걷다 보면 처음과는 달리 방향이나 방법을 바꿔야하며 불만족에 빠진다.그래서 때로는 스스로 막다른 길을 만든다.어두운 공간에 갑자기 들어서 본 적이 있는가?시간은 걸리지만 기다리다 보면 조금씩 스스로 볼 수 있다.이 어두움은 모든 일상에서 불현듯 생겨난다. 예측하고, 예상해도 밝아지는 일은 온전히 기다려보는 일이다.


  Q 2022년 그리고 그 이후의 계획이 궁금하다. 코로나가 당신의 예술 실천에 어떠한 변화를

주었다 생각하는가?

왜인지 모르게 새로운 제작방법이나 연출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이 압박은 작품에 근 3년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앞으로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최근 전시에서 디지털제작방식에 대한 연구까지 충분히 해본 것 같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제작방식을 기본으로 발전시키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평범한 것들이 많이 사라졌다. 사람들을 만나려면 어떤 과정들이 생겼고 자연적으로 삶이 단순해졌다. 일상의 수집과 관찰을 넘어 더 많은 창의성이 필요해졌다. 이런 창의성의 원동력은 다음세대를 위한 약간의 책임감이라고도 생각한다



Q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예술가는 땅을 걷지만 늘 하늘을 본다. 하늘을 보고 땅위에 길을 상상한다. 누군가는 하늘을 보며 상상한 길이 땅에 막다른 길에서는 멈춰서 버리기도 하고, 잠시 땅을 곁눈질하다가 자신이 보던 하늘을 놓쳐 버리기도 한다. 처음의 예술가는 대부분 밤의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다. 시간이 지나 구름한점 없이 맑은 낮이 되기 시작하면 하늘은 시시해져 하나둘씩 땅을 보며 걸어가 버린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예술가는 아무것도 없는 낮의 하늘을 여전히 바라보고, 빈 여백을 상상하고 그 미묘한 변화를 즐기는 사람이다.그러고 있으면,우연히 그의 주변에 지나던 땅만 보던 사람도, 무심결에 같이 하늘을 본다. 이내 그들은 다시 땅을 보며 나아가겠지만, 그 순간 자신들이 모두 처음에는 예술가였음을 떠올린다.이 이상적인 예술가의 성공은 아마도 그의 주변인들이 함께 하늘을 보게 만드는 순간일 뿐일 것이다.그래서 예술가의 성공은 항상 점멸한다.